짧지만 길~어질 수 있는 미래

“70년대에는 지금까지 클럽이란 게 거의 없었어. 그 때는 주로 통기타 쪽이 많았지. 나라에서 장발족들 규제하면서 음악에 대해서도 간섭하고 개입하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군부대나 미군클럽에서 노래를 했어. 패티김 같은… 알지? 그리고 명동에 <쉘부르>라고 있었는데 거기는 통기타쪽이었고…그 때 밴드들은 나이트 클럽에서 활동했었지.” 홍대 앞에서 클럽 <프리버드>를 운영하고 있는 김버드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신촌, 홍대 앞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근원지, 락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하지만 70~80년대에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신중현이 이태원에 <락 월드>를 열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80년대 <신촌 블루스>, <레드 제플린> 등의 공연장도 정착되지 못하고 곧 사라졌다. 같은 연도에 들국화의 전인권이 운영했던 <우드스탁> 역시 ‘크래쉬’ 등 메탈세대를 배출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프리버드>가 생기기 이전 김버드 씨도 70년도에 처음으로 광화문에 클럽을 운영했었다고 한다. ” 그 때 광화문 근처에는 고등학교가 많았어. 그러다 보니깐 맨날 고등학생만 오고. 술도 팔 수가 없는 거야. 그 당시 전인권이랑 같이 있었는데 장사가 안되니깐 1년하다가 관뒀지.”

그 이후 90년대 초반 다시 <락 월드>가 생기고 <더블 듀스(현 스팽글)>가 나타나면서 클럽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94년 <드럭>의 출발로 <프리버드>, <블루 데블> (지금은 없어짐), <스팽글>, <재머스>, <하드코어>, <롤링 스톤즈>, <마스터 플랜> 등의 클럽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고, 개성 있는 젊은이들이 자주 드나든다 는 홍대 앞의 지역적 특성 덕분에 이 일대는 자연스럽게 라이브 클럽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클럽들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무대에 설 밴드도 없었고 사람들의 클럽에 대한 인식 또한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클럽 중 약간 나이가 있는 프리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프리버드> 홍보를 위해 김버드 씨가 직접 각 대학을 다니며 포스터도 만들어 붙이고, 밴드도 모집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의 과정을 거친 후에 <프리버드>는 국내 밴드 뿐만 아니라 ‘Mr. Big’, ‘Steal Heart’ 같은 외국 그룹도 공연하는 유명한 클럽이 됐다. “내가 처음 여길 오픈할 땐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나만이 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갖고 시작했지. 한참 클럽에 대한 붐이 일었을 때도 난 걱정 안했어. 나만 잘하면 되는 거야. 아무리 많은 클럽들이 생겨도 잘하는 곳은 살아남고, 없어지는 곳은 없어지는 거지.”

실제로 운영에 실패한 클럽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다. <블루데빌>도 95년 오픈했다가 자금난으로 97년 문을 닫았다. <스팽글> 역시 <더블듀스>에서 <태권브이>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뀐 역사를 가지고 있다.

98년 현재 홍대 근처의 잘 나가는 클럽들은 모두 그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처음에 레게바를 구상했다가 지금은 펑크 파티장이 된 <드럭>. 이 곳은 음식이나 주류의 판매가 가능한 ‘유흥업소’가 아닌 ‘공연장’으로 허가를 받은 장소이기 때문에 ‘생수’와 펑크 음악만이 존재한다. 음악 소모임으로 시작했던 <마스터 플랜>은 락 뿐만 아니라 힙합과 테크노도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하드코어>는 온갖 시끄러운(!) 음악들을 모두 취급하며, <재머스>는 사운드에 신경을 많이 써서 빵빵한 느낌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언더’가 아닌 ‘오버’에 위치한(2층에 있음) <프리버드>는 다른 클럽에 비해 넓어서 관객들이 편안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으며 모든 요일마다 공연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몇 년 전부터는 클럽들의 레이블 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96년 10월 <드럭>의 ‘아우어 네이션 Our Nation Vol. 1′을 선두로 97년 <재머스>가 ‘Rock 닭의 울음소리 ‘를 내놓았으며 98년 릴레이 싱글 앨범 시리즈를 발매하기 시작했다. <롤링 스톤즈>와 <하드코어>도 98년 3월 동시에 옴니버스 앨범을 발표했다. <프리버드>도 처음에는 음반 제작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여건상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클럽 문화가 활성화된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붐이 일어나서 신촌, 홍대 쪽으로 집중되고, 클럽 레이블이 나오고, 클럽들마다의 특색있는 내용을 가지게 된 기간이 넉넉잡아 10년 정도. 외국의 문화 선진국들의 역사와 비교해 보면 터무니 없이 짧다.

이렇게 된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지금 당장 드러나고 있는 문제는 법적인 부분이다. 비싼 세금 때문에 유흥 음식점 허가를 받지 못해 당국의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장사도 안되고 법적인 문제까지 걸려있는 클럽이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온 것은 음악을 진정 아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음악이 좋아서 클럽을 운영하고, 무대에 서고,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 찾는 사람들. 지금까지 짧은 클럽의 역사가 이들에 의해 어떻게 바뀔지는 정말 장담하기 어렵다.

Sphere It

회귀인가, 또 다른 변혁인가!

정태춘은 텔레비전 출연을 하지 않으면서도 세간의 관심을 끄는 가수이자 운동가이다. 그는 확실히 우리나라 반세기 대중가요사에서 전무한, 매우 특이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대중가요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노래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노래 일꾼, 정태춘. 그는 그렇지 않아도 다양성과 창작열이 부재한 우리 대중가요계에 질곡으로 자리잡고 있던 음반심의 문제 해결에 선각자 역할을 함으로써 음악인들의 자유로운 창작여건을 마련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음악적 변화와 노력, 그리고 그가 노래 속에서 꿈꾸었던 ‘변혁’의 이야기를 그의 노래들을 (그의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라)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노래들은 우리 대중가요계의 큰 흐름 속에서 아주 작은 물줄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은 물줄기는 대중가요계의 변화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 줄 수 있는 바로미터이며, 그가 노래했던 방식이 항상 ‘리얼리즘’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본문 내용에서는 정태춘이 발표한 앨범을 중심으로 그의 음악적 행보를 되짚어 보기로 한다.)

1집: 시인의 마을/ 1978 / 서라벌 레코드
“창문을 열고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당신이 텅빈 가슴으로 불어오는 더운 열기의 세찬바람 살며시 눈감고 들어봐요.
-중략-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향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시인의 마을>

정태춘은 1978년 입대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게되어 그 해 11월에 첫음반 ‘시인의 마을’을 내면서 가요계에 순조롭게 데뷔했다. 원래 스크랩이나 앨범 정리 등을 좋아했던 그는 자신이 만든 노래를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중, 음반사가 보기에 인기를 얻을만한 몇곡을 뽑아 취입을 한 것이다.

첫 음반의 반응은 좋았고, 이에 1979년 문화방송 신인가수상과 방송 가요대상 작사부문(’촛불’) 상을 수상하는 등 대중가수로서 순조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이 앨범의 첫곡인 ‘시인의 마을’은 우리나라 대중가요 수십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독특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른바 대중가요의 주류로부터는 확실히 벗어나 있는, 쓰리핑거 주법의 전 형적 포크음악의 분위기에 실린 이 독특하고 이채로운 노래가 70년대말의 억압적 분위기에서 질식할 듯한 삶을 살아가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 작품은 발표당시인 1978년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에서 전면 개작의 판정을 받아, 음반사에선 ‘탈춤의 장단’을 ‘생명의 장단’으로, ‘번민’을 ‘사색’으로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를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가사 몇 부분을 적당히 고쳐 심의에 통과하였다. 이때부터 그와 공윤의 실랑이는 그 서막을 비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앨범에 실린 또 다른곡 목포의 노래(여드레 팔십리)는 세마치 장단을 연상시키는 박자에 부분적으로 민요의 느낌을 주는 선율을 가진 곡으로 1집에선 기타를 중심으로 양악으로 반주되어 있는데 비해, 뒤에 나오는 3집에선 장구와 피리, 가야금 등의 국악반주로 실려있다. 1979년 작사 부문상을 받은 ‘촛불’은 정태춘 작품중 보기드문 사랑 노래로서 나중에 아내가 된 박은옥과 연애하던 때의 감정이 잘 묻어나 있는 노래다. ‘아하, 날개여’라는 작품은 희망적인 가사로서 어필했으며 강한 비극성과 서정적인 정경묘사가 돋보이는 ‘서해에서’는 군대시절 인천바다를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서해를 상상하면서 만든 노래라고 한다.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들이 다 그러하듯 모든 곡의 작사 작곡은 정태춘 스스로가 했다. 본격적인 대중 가요의 길로 들어서는 첫 시기의 작품치고, 그의 노래 대부분은 흔하디 흔한 사랑타령, 이별타령의 싸구려 정서에서 분명히 벗어나 있었다. 정태춘 자신은 ‘상업적으로 변형된 포크’이자 사춘기적인 감상이 담긴 앨범이라고 하지만, 명백히 70년대 초반의 모던 포크를 계승한 기념비적인 음반이다. 또 이 앨범을 통해 80년대에 이정선과 자웅을 겨루던 어쿠스틱 기타리스트 유지연이 처음 편곡/세션으로 입문하기도 했다.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1980/ 서라벌 레코드
“승냥이 울음 따라, 따라 간다 별빛 차가운 저 숲길을 시냇가 물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어서, 어서 가자 길섶의 풀벌레도 저리 우니 석가 세존이 다녀 가셨나 본당의 목탁소리 귀에 익으니 어서, 어서가자
-중략-
뒷전에 있던 동자승이 눈 비비며 인사하고 합장해 주는 내 손 끝 멀리 햇살 떠올라 오는데 한수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해탈 스님의 은은한 미소가 법당 마루에 빛나네” <탁발승의 새벽노래>

79년부터 준비를 하여 80년 1월에 출반된 정태춘의 두 번째 음반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첫 번째 음반에서 그의 재질을 인정한 서라벌레코드사 사장이 두 번째 음반에서 선곡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탁발승의 새벽노래’ ‘사망부가’등 어떻게 보면 첫음반보다 그의 특성은 더 잘 드러나 있는, 그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노래들을 수록했지만 안 팔리는 것을 어쩌랴?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가수’. TV에 출연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수의 경우 대중매체 이외의 경로를 이용해서 인기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가요계의 공식에 너무도 둔감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앨범에선 더 이상 ‘촛불’과 같은 사랑노래가 없다. 그의 음악세계가 바뀐건 아니었다. 늘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었고, 일기를 쓰듯이 노래를 만들었다. 그럼 이제 그의 노래를 살펴볼까!
이 음반에선 외로움과 머물곳 없는 심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해내는 시같은 노래들보다, 깨달은 자의 은은한 미소같은 ‘탁발승의 새벽노래’가 단연 돋보인다. 이 노래는 당시 승려를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정돈이 잘 된 작품으로, 그의 승려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나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 만든 ‘사망부가’는 대중가요에서 볼 때, -대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은 많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 없었기에- 흔하지 않은 작품이다. 그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실제의 경험 때문인지, ‘그리운 어머니’에 비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훨씬 구체적이고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도 대중가요로 부적당하다는 공윤의 판정이 내려진 곡이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탓일까?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발매했던 이 음반은 입수할 수가 없 었다. 그래서 수록된 곡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음을 밝힌다. 인기가 없다고 앨범마저 구할 수 없는 현실의 비통함을 절절히 느끼며 2집 음반에 대한 아쉬움을 접는다.

3집: 우네/ 1980-1983사이/ 서라벌레코드
“오늘은 오랜만에 재 너머 장 서는 날 아버지 조반들고 총총히 떠나시고 어머님 세수하고 공연히 바쁘시고 내누이 포동한 볼 눈매가 심난하다
-중략-
비야 비야 오지마라 재 너머 장거리에 몰래 나간 우리 누이 비 맞으면 혼이 나고 포목전 예쁜옷감에 공연히 설레이다 이리 질척 저리 질척 장 구경도 다 못한다” <비야, 비야>

2집 음반의 상업적 실패로 생계의 문제가 들이닥친 상태에서 만든 세 번째 음반 <우네>는 음반시장에 제대로 깔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음반의 앞면에 실린 ‘새벽길’, ‘우네’, ‘비야 비야’ 등은 가야금, 피리, 해금 등의 국악반주로 연주되어 있다. 정태춘은 이 음반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음악 속에서 국악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에헤라 친구야’는 앞면에서는 국악, 뒷면에선 양악으로 연주되어 있다. 또한 음반 <시인의 마을>에서 양악으로 연주된 ‘여드레 팔십리’가 이 음반에서는 국악으로 편곡, 연주되어 있어 흥미있는 대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비야 비야’라는 곡은 오랜만에 온 장날, 마음 들뜬 시골 마을의 한 식구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공연윤리위원회에서 가정을 부정적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공윤과 작가 사이에 실랑이가 오간 작품이다.

단순한 구조의 가사와 악곡이 동요와 같은 친근함을 주는 ‘에헤라 친구야’는 다른 많은 대중 가요들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 장미꽃, 까페의 불빛 등의 표현과 비교해볼 때, ‘박넝쿨위의 박꽃, 새벽 안개 속의 새소리’ 등의 가사에서 향토적인 정서에 기반한 작가의 감수성 본질을 짐작케 한다. 이 음반도 2집과 마찬가지로 구할 수가 없었음을 사과드리며 또 한 번 아쉬움의 한숨을…휴…

4집: 무진 새노래/ 1988/ 한국음반
“고향 하늘에 저 별, 저 별, 저 많은 밤 별들 눈에 어리는 그날, 그 날들이 거기에 빛나네
-중략-
햇볕이 좋아 얼었던 대지에 새 풍이 돋으면 이 겨울 바람도, 바람의 설움도 잊혀질까 고향집도, 고향집도” <실향가>

88년 정태춘은 그의 새로운 경향이 음반으로 표현된 <정태춘·박은옥 무진 새노래>를 발표하게 된다. 이 음반에는 그동안 심의를 의식해서 발표하기 힘들었던 몇 편의 곡들이 실렸고, 신작인 ‘아가야, 가자’가 실렸다. <무진 새노래>는 그에게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리는 음반이다. ‘삶의 문화’라는 자신의 독자적 창작 활동의 공간속에서 나온 첫 번째 음반이었고 작곡면에서 볼 때 ‘전통’에 대한 관심에서 더 나아가 ‘소리’ 자체의 ‘전통’성에 대한 탐구가 반영되기 시작한다. 북, 꽹과리, 태평소, 피리, 가야금까지…

당시에 국악을 접목시켰던 한국의 가수들 이라면, 혹은 소위 순수 음악인들을 살펴본다면 아마도 ‘김수철’, ‘황병기’와 ‘김영동’ 정도일 것이다. 이전의 음반에 비해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의 가사는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산문적이며, 보다 직설적으로 이즈음부터 그의 작품의 가사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이 음반에서 ‘그의 노래는’ 이라는 곡의 창작 당시 원래 제목은 ‘나의 노래는’ 이었다. 세상과 삶에 대한 비관적이고 자학적인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는 것으로, 88년에 발표될 때 ‘그의 노래는’ 으로 제목을 바꾼 것은 88년에 이르러 그 자신의 자학적이고 비관적 태도를 반성적으로 생각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얘기 2′는 음반으로 발표된 것은 88년이지만, 오래 전에 만들어둔 작품으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인식세계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만들고 난 후 발표되기까지 3,4절 가사가 많이 바뀌었다. 공윤의 심의를 의식해서 바꾼 부분도 있지만, 개념적이어서 불편한 표현을 형상적인 표현으로 다듬은 부분도 있고, 작품을 만들 당시와 생각이 달라져서 가사를 바꾼 부분도 있다. ‘고향집 가세’라는 곡은 현재적 시점에서 고향에 대한 생각이 가장 객관적으로 정리된 노래인데, 6절 가사인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융단 같은 골프장…’은 원래 지을 때에는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꿈처럼 내려앉은 낙하산, 파란 하늘가에 떠 있는 뭉게구름도’였다. 어릴적 저 멀리 미군부대 쪽에서 보이는 낙하산과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의 어울림은 마치 꿈과도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 노래를 지을 당시만 해도 작가는 이러한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옮겨놓았었고, 후에 88년 음반을 만들면서 가사를 고쳤다. 그나마 이 6절은 미군부대 등의 가사 때문에 심의에 걸려서, 음반에서 빠져 있다.

음반 <무진 새노래>와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가장 큰 폭으로 변화한다(이 시기부터 그는 대중이 모여있는 곳에서 더 이상 ‘촛불’과 같은 자신의 옛노래들을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보다 현실 속에 서 있는 노래꾼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자각해 나간다. (85년 1월부터 시작된 ‘정태춘 박은옥 노래마당’과 88년 12월에 부산에서 시작한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공연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5집: 아, 대한민국…/ 1990/ 한국음반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는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엔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중략-
방문은 꼭 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우리들의 죽음>”

이 무렵 정태춘은 음악 운동을 통해 사회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사회의 -좋은 방향으로의-변화였고 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자신의 몫은 ‘삶의 노래’이었다. 그 문제에 대한 그의 고민은 진지했고 그 고민의 결과로 나온 노래들은 처절하리만큼 현실에 뿌리박혀 있었다. 그는 그러한 음악 운동의 성과를 모아 새로운 음반을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 노래들과 이전에 공윤 심의에 걸려 음반화하지 못했던 ‘인사동’ 등을 다시 심의받는다. 하지만 그 많은 작품중에 심의에 통과한 것은 고작 ‘황토강으로’ 뿐이었다.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였으며 이윽고 불법 음반의 형태로 <아, 대한민국…>이 발매된다. 정태춘과 ‘공윤’과의 공식적 법정 투쟁 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음반은 무엇보다도 <누렁 송아지> 노래극 이후 그가 재발견한 국악기 소리의 또다른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소리 전반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구태여 단어를 선택해서 표현하자면, 그 소리는 바로 ‘힘’과 ‘공격성’이라 하겠다. 그가 하는 노래는 이제 더 이상 강 건너에 있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전통은 ‘박제’가 아니고, 또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인사동’). 그의 노래와 함께한 악기는 조선시대의 북, 꽹과리가 아닌, 90년 대한민국의 북, 꽹과 리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이전의 생각과 표현력을 더욱 집요하게 추적하고 정선했으며 심의를 무시했다. 정태춘의 다른 음반과 비교했을 때 보여지는 특징이라면 이전의 여느 곡들보다 길어진 가사, 전통 악기에 대한 공격적(?)해석인데, 그의 사상적 성장과 음악적 성장이 맞물려 얻어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의 과격함(?)으로 인하여 이 앨범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 실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과 아름다운 언어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하는 것이지 현실 속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선 안된다는 것 이다. 말하자면, 현실 속에서는 우리의 아이들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불에 타 죽어가건 말건, 가수들은 아름다운 사랑과 아름다운 고향, 그리움…뭐, 이런 것만 노래 해야한다는 얘기다. 이 앨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이 특히 잘 걸고 넘어지는 곡은 ‘아, 대한민국 …’과 ‘우리들의 죽음’이다. “무슨 보고서인가?” “이 노래는 예술적 승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곡” 이라는 식의 주장을 펴는데 그들이 말하는 “예술적 승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리얼리즘을 단지 하나의 (부정적 의미인) 형식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이러한 주장은 리얼리즘이 가장 낙후된 표현 양식이라는 인식에서부터 그들의 주장을 시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음반의 네 번째 곡 ‘일어나라 열사여’는 이전 운동권 음악에서 주로 사용되던 서구적 행진곡풍 멜로디를 배제했다. 국악기를 사용한 노래이지만, 기존의 매체에서 보여줬던 타령조의 ‘음풍농월’ 혹은 ‘세월한탄’의 가락이 아닌 분노와 저항의 장단이자 가락이다. 이곡의 후반부로 치달으며 작열하는 풍물의 ‘공격적’ 음색은 이러한 모든 다양성을 단순히 ‘한’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거세시키고 ‘강 건너 불 보듯’하라는 식의 강요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유일하게 심의에 통과한 운좋은(?) ‘황토강으로’는 역동성을 지닌 ‘풍물’을 강물의 굽이침에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는 곡이다. 이 앨범을 통틀어 볼 때 단연 돋보이는 곡은 ‘일어나라 열사여’, ‘황토강으로’, ‘그대 행복한가’, ‘우리들 세상’이라 하겠다. ‘그대 행복한가’를 통해 그는 누구도 이야기하기 꺼려했던 문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그러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해답을 ‘우리들 세상’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앨범 연주의 대부분은 드럼 대신 북을, 건반 대신 꽹과리와 태평소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악기의 선택으로 정태춘은 그의 표현 영역을 좀 더 넓힐 수 있었다. 표현 영역이 획장되었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어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반 사전심의제 철폐로 이제 <아, 대한민국…>은 ‘불법’의 딱지를 떼고 우리 곁에 다시 당당히 찾아왔다. 이를 단순히 음반의 ‘복각’이나 개인적인 ‘기념’의 의미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오랜 싸움이 만들어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문화사적 사건으로 이해함이 옳다.

6집: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3/ 한국음반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난 사람들 탑골 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차도에 매달힌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중략-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92년 장마, 종로에서>”

공윤에 대항해 ‘표현의 자유’를 시작한 후 드디어 91년 2월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고 정태춘은 93년 공윤의 사전심의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새 음반을 발매하게 되는데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음반에는 91년 바뀌어버린 세상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하는 그의 고민이 배어 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보면 전작(<아,대한민국…>)이 ‘동적’이라면 본작은 ‘정적’인 느낌을 준다. 이 음반은 72년 작품인 ‘양단 몇 마름’을 수록하고 있고, 입시의 무게에 눌려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박은옥의 ‘비둘기의 꿈’, 듣는 이들이 마치 동네 여기 저기를 돌아다닌 듯한 느낌 속으로 안내하는 ‘사람들’, 일본 관광객들의 작태를 트롯 선율로 이야기하는 ‘나 살던 고향’과 LA에 사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조금도 과장이나 허구 없이 늘상 대하는 그이들의 일상을 한 구경꾼이 둘러보고 쓴듯한 ‘LA 스케치’ 등의 곡을 포크계열의 느낌으로 담고 있다.

이 음반에서 정태춘은 <아, 대한민국…>에서 넓어진 세상에 대한 관심의 폭을 유지한 채 그 시 기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세상를 다시 차분히 바라보고 있다. 포크를 중심으로 트로트, 남도 구음, 풍물 등 각기 다른 의미의 음악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하나의 풍경화를 그려나간다. 그의 풍경화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넘어서서 세상의 흐름을 진지하고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다.

정태춘은 이 음반을 내면서 몇가지 것을 함께 생각한 듯 보인다. 작품의 분위기를 <아, 대한민국…> 과는 다르게 바꾸면서 다시 방송, 제도권 가요계로 접근해 들어가는 것, 그러면서도 그의 소신을 청산하지 않을 것, 작품의 질로서도, 음반을 발표하는 행위로서도, 대중가요계로 다시 접근 하는 방법으로서도 모두 의미 있고 중요한 행동이여야 한다는 생각들을 말이다.
그가 이 음반에서 가장 애착을 가지는 곡은 타이틀 곡인 ‘92년 장마, 종로에서’이다. 대중적인 작품일 수는 없지만 그가 말하고 싶었던 민주주의, 평등사회, 인간해방, 민족통일 등의 가치들을 위해서 그간 열심히 노력해왔던 사람들에게 격려의 노래가 되길 바라는 그의 바램이 나타나는 부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음반의 자켓 사진은 <아, 대한민국…>을 제외한 이전의 음반들이 보여주는 자연풍경의 그림이나 농촌 토담집, 풀섶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종로 한복판에 그가 있다. 그는 도시에 살고, 또 이 복잡한 도시에서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힘겨운 삶이 바로 정태춘이 노래해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음반에서는 자신의 현실적인 자리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차분함, 침착함이 느껴진다. 단호한 주장보다는 현실 바깥의 풍경을 찬찬히 그려나가고 있다. 그런 느낌 때문일까? 편곡의 질감도 이전보다 훨씬 도시적인 매끈함이 스며들어 있다.

7집: 정동진/ 건너간다/ 1998/ 한국음반
“맑은 햇살 푸르른 수풀 돌보지 않는 침묵의 땅 긴긴 철조망 살벌한 총구 저 갈 수 없는 금단의 땅 바람에 눕는 억새위 팔랑거리는 흰나비 저 수풀 너머 가려에 저 산도 넘어 가려네 <민통선의 흰나비>”

전작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나온지 5년만의 신보임과 동시에 정태춘·박은옥의 20주년 기념음반인 ‘정동진/ 건너간다’. 이 음반에서는 훌쩍 바뀌어 버린 세상을, 바뀌기 전의 세상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이들 부부가 바라보던 세상에 대한 낮은 목소리가 담겨있다.

최성규, 조동익 두 젊은 거장이 프로듀서한 음반으로, 기타 선율위에 박은옥의 투명한 목소리가, 정동진에 서 있는 화자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 듯 전개되는 <정동진(1)>로 시작된다. 특이할 만한 점은 조동익과 함께 프로듀서를 맡은 최성규가 이들 부부의 곡에 사운드적인 변화를 시도, 편곡은 물론 다양한 악기의 도입으로, 이들의 곡을 한층 세련되게 만든데 있다.

음반내에 <5.18>과 <건너간다>는 정태춘의 변치 않는 삶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는 곡으로, 뒤이어 <정동진(2)>가 조동익의 새로운 편곡으로 실려 있다. ‘정동진/ 건너간다’ 음반엔 정태춘·박은옥의 소망(언제까지나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 함께 노래 부르고 싶은 그런 소망)이 담겨있다. 그리고 90년대 변화한 세상을 바라보며, 무대 위의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만나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번 음반에선 이전 작품(아, 대한민국…)에서 보여지는 사회에 대한 표면적인 분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삶 자체의 문제를 단 하나의 가식도 없이 표현하고 있을 뿐. 올해로 음악 생활 20주년을 맞는 이들 부부에게서 아직도 음악에의 열정(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느낄수 있다.

앞으로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변모할지는 더 두고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 부부가 바라보는 세상이, 적어도 그들 노래 속에 담겨있는 우리의 모습은 거짓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및 관련 사이트>

  • 정태춘 1.2(한울 출판사)
  • Sphere It

    닥쳐 니가 언더그라운드를 알아?

    흔히 TV에서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가수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언더그라운드란 무엇인가? 단순히 인기를 얻기 전에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 거치게 되는 무명의 시절을 말하는 것인가? TV 출연을 하지 않는다면 전부 언더그라운드 가수인가?

    꼭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가진 또다른 고정관념일 수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그들 외면의 모습이 아닌 내면의 음악세계를 들여다 본다면 언더그라운드의 개념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국내 언더그라운드 음악 중에서도 중심이 되었던 언더그라운드 락의 흐름을 들국화와 시나위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1980년대 왕성한 활동을 했던 들국화와 시나위는 언더그라운드 (락)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양대 산맥과도 같은 존재다. 이 두 그룹은 80년대에 언더그라운드의 절정기를 만듦으로써 70년대의 위축되었던 언더그라운 드의 상황을 극복하는 주역이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자연발생적이며 반상업적인 특징을 가졌다. 이는 또한 상업화된 제도 음악계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욕구를 해소하는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일반인들에게 언더그라운드의 존재가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뚜렷한 실체를 알기 힘든 단편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다른 대중음악에 비해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사회문화적인 연구를 시도한 예가 없었고, 음반판매나 공연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자료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이는 한편으로 보면 국내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존재 자체가 모호하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의 원래 뜻은, 주류와는 다른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공유한 사람들이 구성한 공동체가 그 공동체의 이름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크게 전환되는데, 이는 ‘언더그라운드 문화공동체’라는 존재가 전무했던 사회적 배경에 기인한다.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라함은 주류 음악과의 차별성을 가졌던 ‘언더그라운드 음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외국의 락이 들어와 활성화 된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국내 락의 고유한 색깔은 미 8군에서 경력을 쌓은 신중현에 의해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여기서부터 국내 언더그라운드의 역사가 시작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걸쳐 국내의 독자적인 락 문화를 정착시킨 신중현은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로 인식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신중현의 활동에 힘입어 산울림, 작은거인(김수철), 송골매 등의 캠퍼스 락 밴드들은 포크와 함께 청년문화의 한축을 이루었고, 이후에도 나름대로의 진지를 구축하며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비교적 ‘뜬’ 밴드로서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정치적으로 억압되었던 사회 속에서 대다수의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은 위축된 채 가까스로 버티는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언더그라운드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상이한 두 언더그라운드씬은 다음과 같다. 한 쪽은 락의 정서를 기반으로 포크, 블루스 등의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해 ‘한국적 락’을 선보인 들국화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쪽은 백두산을 중심 으로 시나위, 블랙신드롬 등의 그룹이 쾌거를 이룬 헤비메틀 씬이 있었다. 이들은 수용자들 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언더그라운드 역사에 큰 획을 그었지만 1990년대 들어 해산하거나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특성은 메탈 공동체, 캠퍼스 청년문화, 신촌 언더그라운드로 요약 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한 두개의 씬으로 규정지울 수 없는 여러가지 모습의 밴드들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출현하였다. 특히, 1995년부터는 홍대 앞 클럽을 중심으로 인디(펜던트)음악을 하는 밴드들이 출몰했으며, 이들은 메이저 음반사업을 거부하며 인디 레이블을 설립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유통망을 개발하는 등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물론 ‘인디 음악 =언더그라운드 음악’이라는 등식을 떠올려서는 안되겠지만 큰 줄기로 본다면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인디음악을 포함하고 있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락의 양대산맥 ‘들국화’, ‘시나위’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들국화와 시나위는 언더그라운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논자에 따라 헤비메틀 씬에서의 선각자는 백두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들이 짧고 폭발적인 활동을 끝으로 그 생명력을 다했던 이유로 여기서는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이끌었던, 한국 메탈계의 공식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시나위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그 중에서도 들국화는 신중현에 의해 뿌리내려진 한국적 락의 정통 계승자라 할 수 있다.

    들국화의 중심에는 상이한 정서를 가진 두 사람 - 전인권과 최성원이 있었다. 그들은 곧잘 한국의 비틀즈로 불리웠으며, 나타나자마자 완벽한 연주와 창의력 있는 노래로 당시 팝 음악에 심취해 있던 청소년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들의 출현은 말 그대로 폭발적인 현상이었으며 하나의 사건이었다. 자신들의 음악적 기량에 당시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가사를 결합시키면서 ‘한국적 락’의 모습을 구현했던 들국화는 전국순회공연과 라이브앨범의 성공 등 상승가도를 탔다. 그러나 1989년, 구성원들 간의 견해 차이로 아쉬운 해산을 하게된다. (만일 들국화가 4집까지만이라도 앨범을 냈더라면 한국 음악계의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최성원과 전인권의 음악적 지향 차이는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큰 간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뮤지션으로서 쉽게 화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998년 허성욱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모인 이들은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한다. 명성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1980년대, 헤비메틀계는 시나위를 주축으로 국내 헤비메틀의 전성기를 만들어 나갔다. 연주자들의 변동이 심했던 시나위는 그로 인해 -자의가 아닐지라도-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하게된다. 파트별로 살펴보자면, 보컬에서는 임재범-김종서-김성헌-손성훈-김바다로 이어졌고 베이스에서는 강기영-김영진-서태지-정한종, 드럼에서는 김민기-오경환-신도현으로 멤버 변동이 이루어졌다. 헤비메틀은 젊은이들의 음악이었고,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강력하고 격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에 무당, 시나위, 부활, 메틀 프로젝트 등의 활동으로 국내 헤비메틀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 높아진 상태에서 발매된 시나위의 데뷔 음반은 헤비메틀 매니아 인구의 확산에 기여했다. 당시 마이너 중의 마이너 음악으로 취급받던 헤비메틀은 시나위 데뷔 음반 이후로 하나의 대중음악 장르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외국곡의 카피가 아닌 창작곡으로 채워졌다는데 의미가 있다.

    메틀의 전성기라고 얘기되어지는 1980년대에는 이 외에도 스트레인저, 블랙신드롬, 블랙홀 등 많은 메틀 밴드들이 각자의 영역을 개척하며 꾸준한 활동을 했다. 스트레인저는 부산 ‘메틀 라이브’ 출신으로 1990년대 초 지방 메탈 세력의 큰 흐름을 주도한, 서울 중심의 헤비메틀 씬을 지방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 밴드이다. 블랙신드롬은 1980년대 헤비메틀 밴드들 중 살아남아 활동했던 몇 안되는 밴드에 속한다. 그리고 블랙홀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을 해 온 밴드이다. 그들은 시대에 따라 음악적 변화와 성장을 거듭한 밴드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언더그라운드 다양한 뮤지션들로 활기

    80년대 메틀 씬의 전성기가 지나고 침체기를 맞이한 90년대 초에도 주목할 밴드들은 있었다. 바로 크래쉬와 사하라, 미스테리, 노이즈 가든이 그들이다. 크래쉬는 여느 메틀 밴드보다도 강력하고 무거운 사운드로 헤비메틀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하라는 인천출신의 밴드로 메틀의 침체기에 지방 메탈 씬을 활성화시킨 밴드라고 할 수 있다. 미스테리는 당시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여 탄생시킨 슈퍼밴드였다. 그리고 노이즈 가든은 9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메틀밴드답지 않은(?) 메틀밴드였다. 그들 음악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소강 국면을 맞이한 메틀 씬의 명맥을 유지시켰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1980년대 국내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비교적 장르별 구분이 가능했던 것에 비해 90년대에는 그야말로 장르를 따지기 어려운, ‘인디음악’이라 불리는 다양한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1990년대에 들어서 등장한 ‘인디(펜던트)문화’ 개념을 한국 사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인디음악’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인디 음악은 주류 팝과 음악 자본에 대한 반란이다. 어떻게 보면 Punk의 D.I.Y.(Do It Yourself)정신과도 통하는 것이 바로 인디 음악이다. 스스로 노래하라. 스스로 공간을 만들어라. 스스로 음반을 제작하라. 스스로 유통 배급망을 조직하라. 그리고 듣는 자는 이곳에 와서 스스로 느끼고 참여하라.

    ‘80년대를 대표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그렇다면, 90년대는? 90년대는 그야말로 다양한 뮤지션들의 시대다. 오버그라운드에서 천편일률적인 댄스곡이 장수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지하에서는 다종다양한 색깔의 밴드와 음악이 서로 사이좋게 어깨를 걸고 노래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1990년대 후반, 현재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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